빙과 정발 BD, 에 얽힌 이야기 (1)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취미

교토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TV 애니메이션 < 빙과 >는 이전부터 많은 분들의 국내 정식 발매 청원도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통할만한 작품이라 생각해서 관련 의견을 낸 적이 있는 수작입니다. 작품 자체가 내포한 힘이 있고, 조용하지만 시청자를 끄는 울림이 있으며, 때문에 보고 지나가는 방송보다 소장품으로서의 의미도 크리라고 생각했기에.

다만 (국내에선 제작도 판매도 부담이 큰 BD를 다루는)제작사 입장에선 방영이 끝난지 시간이 좀 흘렀기 때문에- '구작'이라고 하기엔 짧고, '신작'이라고 하기엔 긴 애매한 시간- 화제성 측면에서 뭔가 추가로 한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고, 그 요소로 꼽힌 건 우리말 더빙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법 오랜 시간의 길고 짧은 과정을 거쳐 < 빙과 >도 정발 BD에 우리말 더빙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더빙'이란 전략을 정했으니 '캐스팅'이란 전술을 짜야 하는데, 이게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 것이고, 모르시더라도 (애니메이션이든, 원작 소설이든 어느 쪽이든)접하게 되면 아시게 되겠지만- 이 작품은 네 명의 주역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끌어가는 시간이 길고, 따라서 이 주역 담당 성우의 비중이 굉장히 큽니다.

말그대로 이야기로 압도하는 드라마기 때문에, 그걸 전달할 목소리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말하자면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를 연극/영화/기타 컨텐츠로 만들 때 홈즈 탐정과 왓슨 박사의 배우나 성우가 이 시리즈의 사실상 80%를 책임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주역 캐릭터 4인방의 오디션은 굉장히 지난했고, 저도 제작 관계자로서 의견을 낼 일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식.



- 오레키 호타로

오디션 대상 파트는 1화 초반부의 독백 몇 마디 + 에루와 대화하는 신. 아래 A - G는 모두 각각 다른 성우분들의 결과물.

Case A: 호타로치고는 약간 어둡고, 다소 껄렁한 느낌이 듭니다.
Case B: A를 연기한 분보단 다소 밝은데, 뭐랄까 될대로 되란 식으로 사는 느낌입니다.
Case C: 약간 톤이 너무 똑똑하고 강한 느낌입니다. 호타로치고는 좀 빠릿하고 빨라서, 이미지에 다소 어긋나는 감이 있습니다.
Case D: 선이 다소 가늘고, 마치 어리석은 대중을 관조하는 듯한 느낌?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Case E: 너무 어둡지도 않고, 너무 가늘지도 않고, 너무 빠릿하지도 않은, 가장 적당한 느낌입니다.
Case F: 소설 속의 호타로라면 이 느낌인데, 애니메이션의 호타로치곤 뭔가 더 닳고닳은 아이인 듯해서 매칭이 좀 어긋나는 듯.
Case G: 다소 껄렁하고 될대로 되라는 느낌(B를 연기한 분보다 좀 더)이 더 강해진 듯합니다.


- 치탄다 에루

오디션 대상 파트는 1화 초반부의 호타로와 대화하는 신. 아래 H - M은 모두 각각 다른 성우분들의 결과물.

Case H: 에루의 이미지에 근접하긴 한데, 약간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 같은- 고의로 콧소리를 섞는 듯한- 기분이 있어서 그 부분에 거부감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Case I: 곱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자란 양갓집 규수 느낌. 똑부러지는 느낌이 약간 부족한 듯하지만, 애니의 에루는 소설보다 약간 더 맹한 이미지가 부각되므로 크게 흠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Case J: 똑부러지는 느낌이 좀 더 드는 양갓집 규수. 약간 소설 속 에루 같은 느낌이지만, 지금 단계에서 딱 하나를 택하라면 이 분을 꼽고 싶을 정도로 이미지 매칭도가 좋습니다.
Case K: 약간 어둡고, 말꼬리를 흐리는 느낌입니다.
Case L: 약간 퍼지는 느낌이라, 캐릭터의 성격이 너무 느긋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호타로를 추궁하듯 궁금하다(신경쓰인다)고 할 때의 느낌이 좀 인위적인 감이 있습니다.
Case M: 평소 대화 톤은 에루 이미지이긴 한데, (에루 대사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할)'신경쓰여요'에서 뭐랄까 감정이 다소 모자란 느낌입니다. 마치 나도 이미 다 아는데, 너도 아나 보자 같은?


- 후쿠베 사토시

오디션 대상 파트는 1화 후반부의, 호타로x사토시 대화 신. 참고로 C 성우분은 사토시 오디션엔 안 계셨습니다.

Case A: 좀 붕 뜨는 느낌이라, 다소 행동과 겉도는 느낌입니다. 다만 이 장면이 일부러 과장된 연기가 필요하다고 성우분께서 해석했다면, 다른 상황의 연기도 들어보고 판단하고 싶기는 합니다.
Case B: 담백한 꾸러기 같은 느낌인데, 사토시의 이미지보다 좀 더 나이브한 듯도... 다만, 이런 해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Case D: 너무 톤을 띄우는 바람에 마치 머리 좋은 녀석이 잘난체하는 듯한? 사토시치고는 너무 나간 것 같습니다.
Case E: 호타로에서도 좋았지만, 사토시로도 상당히 좋은 느낌. 너무 질척대지 않고, 완전히 쿨하지도 않아서 좋은 느낌입니다. 다만 장난기가 약간 모자라서, 그 부분에서 호불호가 있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Case F: E의 성우분이 호타로를 맡는다면, 그 페어인 사토시로 적당할 듯. 특히 캐릭터 캐미를 중시한다면, 애니 사토시로서는 적당한 느낌이 듭니다.
Case G: 사토시 단독 분량이 많은 에피소드(ex: 쿠드랴프카)까지 소화하기엔, 가장 적당한 사토시 이미지인 것 같습니다. 호타로의 성우가 어느 분이 되더라도, 독립적인 느낌의 사토시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


- 이바라 마야카

오디션 대상 파트는 1화 중반부의, 도서위원자리에서 호타로 및 사토시와 대화하는 신.

Case H: 새침데기 느낌은 좋으나, 쏘아붙일 때 너무 강한 느낌이 있어서 약간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Case I: 다소 장난꾸러기 느낌인데, 그러다보니 쏘아붙일 때도 마치 예능 연기자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Case J: 마야카로도 좋은 느낌이지만, 마치 원래 모범생이 (아닌 척)연기하는 느낌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Case K: 호타로에겐 쌀쌀맞고, 사토시에겐 좀 애가 타는 격차가 가장 두드러지는 듯. 마야카 이미지로도 적당하고 인간 관계 전달면에서도 제격이란 느낌이라 4인방 중 가장 조연인 마야카에겐 제일 어울리는 듯도 합니다.
Case L: 호타로에겐 무시하는 느낌의 아는 사이, 란 느낌이 딱 좋은데/ 사토시에게도 이게 연장선인 느낌이라, 사토시를 좋아하는 캐릭터라는 인간 관계 전달이 다소 미진한 감은 있습니다. 다른 신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Case M: 마야카치곤 좀 늘어지는 느낌이라, 애니의 뾰족뾰족한 부분 마저 뭉특해진 느낌이 있습니다.



대충 이렇게 의견을 개진하고, 그 이후에도 제작사와 PD분 간의 협의가 계속되고, PD분께선 또 이후에도 (위 오디션을 보신 성우분들 이외의)다른 분들을 대상으로 추가 오디션을 보시고... 이런 식으로 굉장히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특히 호타로가 가장 쟁점이었는데- 당연히 주역 of 주역이란 점,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주목받는 캐릭터라는 점 외에도 근본적으로 캐릭터 이미지와 어딘가 맞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맞는 '애매한 저음'이 (일본어 음성)목소리에 섞여 있었다보니... 이 분위기가 대단히 독특해서, 한국어 음성에서도 이 분위기를 살렸으면 하는 생각이 저나 다른 관계자분들의 머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전 지인과 이 건에 대해 논하면서 '나카무라 유이치 씨(원 일본어 음성의 호타로 담당 성우)에게 한국어를 단기 교습하여 맡기는 건 어떨까?'하고 농담했을 정도로, 하여간 힘들었습니다.(나카무라 씨가 게임 '용과 같이'에서 한국어 대사를 상당히 유창하게 한 적이 있다는 건, 이 지인이 언질해 줘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주역들의 성우가 되셨는가는- 당연하지만 제가 말씀드릴 단계는 아닙니다. 서두르지 마시고 느긋하게 기다리시면, 언제나처럼 영상과 공지 등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고요. 이제 제 일은 우리말 더빙 대본 검토/ 우리말 더빙으로 옮길 때 간혹 있을 쉽지 않은 로컬 번역들에 대한 의견 개진/ 정발판이니 당연히 포함되는 일본어 음성 대응 자막 검토/ 기타 관련된 모든 텍스트 번역에 대한 검토... 이런 것들입니다. 써놓으니 많아보이지만, 계속 했던 거니까... 이번에도 잘 해 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럼 차후 또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나면 적어 보겠습니다~


덧글

  • 산타 2018/04/11 18:15 # 삭제 답글

    무려 cj의 자금을 등에 업은 투니버스조차 명탐정 코난 tv판 방영하고 극장판을 우리말 개봉할 때마다 일본 특유의 말장난 때문에 참 애먹는 게 보이던데 허허 고생이 훤하네요.
  • 城島勝 2018/04/11 20:07 #

    뭐, 이건 돈보단 담당 번역자분의 센스 문제긴 합니다. 하긴 많은 돈 앞에선 없던 센스도 발휘되는 일도 있긴한데...^^;
  • ㅇㅇ 2018/04/11 18:19 # 삭제 답글

    성우분들이 많이 참여해야하는 학원제 에피소드도 기대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직까지도 기억에 선명한 19화의 한국어 더빙이 가장 기대되네요.
  • 城島勝 2018/04/11 20:09 #

    네, 19화는 저도 방영 당시 일부러 포스팅까지 했었을만큼(http://knousang.egloos.com/3356781) 인상 깊었던 화수입니다. 당연히 총력을 다해 살필 생각입니다.
  • ㅇㅇ 2018/04/11 20:55 # 삭제 답글

    미라지가 작업하는 블루레이는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지마님께서 해주시니까 기다리는 동안에도 답답함이 덜하네요. 글만봐도 더빙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게 팍팍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 자주 적어주셨으면 좋겠어요.ㅎㅎ
  • 城島勝 2018/04/11 21:20 #

    덜 답답하시다면 저도 쓰는 보람이 있겠습니다. 여건이 허락하는대로 종종 적어 보겠습니다.^^
  • 요르다 2018/04/12 17:05 # 답글

    좋은 작품이 좋은 결과까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 城島勝 2018/04/12 17:46 #

    하하, 네. 저도 그러길 바라며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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