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용 HDR과 UBD/ HDR의 미래 취미

1.
예전에, 그러니까 2015년 말인가 2016년 초엽인가... UHD-BD(이하 UBD)가 막 발매되기 시작하던 무렵에 A/V나 영화 및 영상 매체를 논하는 동호회 등지에서 극장용 HDR 도입에 대해 의견이 오간 적이 있습니다.

그 골자는 'UBD로 인해 사람들이 HDR의 장점을 알게 되면, 한국 내 극장들도 HDR 영사기를 도입하고 HDR DCP를 들여오지 않을까.' 하는 주제에 대한 예상이었는데, 당시 제 의견은 부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상한 이유는 다음 세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절대 휘도 대응 방식인 HDR10이 요구하는 광량을, 극장의 대형 스크린에 투사할 프로젝터가 없다.
둘째. 그런 프로젝터가 나오더라도, 국내 극장의 프로젝터 설치 실태 상 교체에 나설 가능성은 낮다.
셋째. HDR10은 결함투성이며, UBD의 보급이 빠를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극장에 HDR을 요구할 리 없다.


2.
하지만 당시에도 북미에는 HDR 영사관이 도입되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실례가 있었으니(물론 광량이 매우 낮고 톤 맵핑 기법도 제대로 연구되기 전이라서, 현재 가정용 프로젝터로 보는 HDR 밝기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었지만- 일단 있긴 있었으니), 초장부터 이런 의견을 내는 것은 터부시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2016년 3월부터 실제로 선을 보인 UBD와 HDR10의 실체는, 실제로 누더기나 다름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처음엔 1000니트 휘도만 나오면 UBD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했지만 > 실제론 그 정도 휘도를 내는 디스플레이가 2018년인 지금도 드물 정도이며 > 1000니트를 내봤자 이를 비웃듯, 4천 혹은 6천 니트로 수록된 HDR10을 담은 UBD가 버젓이 나돌아다니는 게 실정입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파편화가 심해졌는지, UBD에 대한 감상은 출시 후 약 2년이 지난 지금도 최소한 세 개 가량의 디스플레이를 동원해야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수긍될 수 있는' 감상을 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정말이지 지금도 1. '1000~1만 니트'라는 최대 밝기를, 2. '절대값 대응식'으로 구현하는 HDR10이라는 기술을, 3. UHD HDR 표준 기술로 공인한 건 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내린 결정인지 알 수가 없네요.

하여간 이렇게, 영화 등 영상 매체에서 HDR10은 아직도 잘해야 일장일단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아예 그 존재조차 희미하고/ 국내 상영관엔 2017년에도 여전히 HDR 상영관이 없었습니다. 헌데...


3.
헌데 그래도 이렇게 지지부진하던 와중에, 발상을 달리 한 극장이 하나 나타납니다.

a. 프로젝터 광량으론 도저히 (극장의 대화면에서)최대 밝기 100니트를 넘기기도 힘드니까
b. 그럼 프로젝터가 아니라 직시형 스크린을 달면 되지 않을까

마침 이 시점에, 국내외에서 잘 나가던 고급 직시형(= TV) 디스플레이 사업이 타격을 맞은 S전자가 들고 나온 '마이크로 LED(실상은 미니 LED라지만, 자발광이 아닌 'Q'LED처럼 그냥 브랜드명이라 쳐주기로 하고)'를 가지고 극장용 대형 직시형 스크린 사업이 태동합니다. 그리하여 2017년 하반기에 L시네마에서 시작한 이 '마이크로 LED 스크린'의 스펙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가로 10.3m/ 세로 5.4m(약 450인치)의 스크린을 수평 16열/ 수직 6열 = 총 96개 mLED 유닛으로 구성
- 최대 밝기 500니트 가능
- TV와 마찬가지로, 극소부위에 높은 휘도를 몰아주는 것이 가능
- 자발광답게 밝기 0의 암부 재현이 가능(픽셀 조정 사항에 따라, 노이즈가 낄 수는 있음)
- DCI 색역 및 HDR 대응

이 스크린 덕에, (겁나게 비싼 프로젝터를 도입할 생각이 없고, 했어봤자 100니트도 못 넘겼을)HDR 상영관이 생길 수가 없었던 한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갑자기 전 세계에서 가장 밝은 HDR 시네마가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닌데...

- 500니트라도 대부분의 DCP가 4천 니트 가까이 올라가는 DCP HDR을 제대로 내는 건 당연히 불가능
- 그렇다고 최대 밝기 100니트로도 제법 기깔나는 화면을 보여주는 돌비 비전을 도입하는 건...
- ...(돌비 반대 진영인 S전자제 스크린이라)돌비 비전 DCP에 대응할 가능성 자체가 없어 보임
- 100년 넘게 이어진 프로젝터/ 스크린의 반사형 시스템에 맞춰 제작, 연출된 작품들과의 묘한 괴리감
(* 이건 TV로 영화를 볼 때, 비단 사이즈 문제 외에도 극장에서 보는 감이 안 나는 이유와 상통)

이외에도, a. 사운드 스크린이 아니라도 스크린의 재질 자체상 어느 정도 소리의 흡음이나 반사 조정이 가능한 일반 스크린과 달리, b. 완벽하게 소리를 반사할 수밖에 없는 '꽉 막힌 스크린' mLED가 프런트 한가운데를 완벽하게 점유하고 있는 문제점 때문에, c. 해당 관의 사운드 상태가 일반 상영관에 비해 다소 퍼지는 편이란 것도 문제지만- 여기서는 HDR과 화면에 대해서만 집중하기로 하고.


4.
그래도 HDR 밝기가 완전하게는 나오지 않아서 제작자 의도를 재현하는 건 완전히 무리라도, 사물의 좋은 면만 보자면 아무튼 이전 SDR보다야 명암의 다이나믹스 폭이 커서 화면 펀치력의 어필이 쉽고 & 스크린 사이즈도 커서 해상감 어필 하기도 좋고 & 대부분의 램프 상태 안 좋은 프로젝터보다 색감도 짱짱하게 낼 수 있는 이 mLED 스크린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사실입니다. 실제로 올해엔 도입을 검토하는 일본/ 미국 극장들도 있다고 하고요.

문제는 애초에 HDR10 이라는 현실을 무시한 반거챙이 테크닉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것을 상찬하며 주입하려 들지 않았다면, 이런 쇼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겠습니다. 굳이 HDR 상영관이 늘어날까 하는 기대를 갖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기존 장비에서도 어필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었다면 자연스럽게 이를 향유하는 계층이 늘어나서 영상에 관심을 갖는 층이 늘어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현실은 다들 겪으시는대로, HDR10도 지지부진/ UBD도 지지부진/ 관련 장비도 지지부진... UHD TV는 양판점에 신나게 밀어넣으니 할 수 없이 사더라도, 굳이 그걸로 HDR을 재생시키는 것 자체부터 별 생각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그나마 게임 유저들에겐 HDR의 실력이 제법 어필하고 있지만, 그건 게임 제작측이 HDR10을 달리 적용하고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건 너무 길어지고, 이 포스트는 영화를 위시한 영상 매체에 대해서만 논하므로 생략.) 그래서 (2년쯤 얼리 어댑터들을 베타 테스터로 실컷 쓰고 나서)HDMI 2.1의 동적 메타데이터 HDR이란 걸 다시 조명하고 있고, 그거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상황.


5.
말하자면 가전/ 타이틀 사들의 지나친 욕심으로, 어쩌면 황금알을 품을 수 있는 거위의 배를 갈라 버린 다음 그나마 개중에서 살려낸 새끼 거위를 다시 키우는 이런 행태라 하겠습니다.

물론 인류는 언제나 그렇듯이 답을 찾을 것입니다. 더구나 매년마다 신제품을 팔아먹어야 하는 가전업계에선, 이제 해상도 숫자 놀음 외에도 HDR이라는 사람 놀려먹기 좋은 카드를 하나 얻은 건 사실이고요. UBD를 위시한 미디어 시장 역시, 스트리밍을 필두로 한 동적 메타데이터 HDR 도입에 점차 다가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행보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BT.709/ 최대 100니트의 SDR 시기의 '정확한 안정감'을 다시 가져다 주기는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입니다. 동적 메타데이터란 건 근본적으로 '기기간 성능 차이를 인정하고, 그거에 맞춰준다.'는 발상이니, 기준을 먼저 잡고 거기에 기기를 맞췄던 시기와 동일해질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제 시청자들은 다들 대충 '그럴싸하게 보기 좋은 명암폭의 화면'을 얻는 대신 '너와 내가 보는 화면은, 기기 급수에 따라 완전히 다른' 화면을 얻게 될 전망입니다.

이 차이는 결국엔 책장 뒤의 쿠퍼 씨가 보는 세상과, (우주선 타기 전의) 책장 앞의 쿠퍼 씨가 보는 세상 수준으로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디지털 세상이 만든 평등이란 미명으로 시작한 UHD/ HDR 테크닉은, 분명 최저 기준선은 좀 올려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최대 기준선은 한도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동적 메타데이터의 HDMI 2.1 세상이 오더라도, 디스크 리뷰에는 최소한 3개 가량의 디스플레이가 필요한 건 매한가지입니다...


덧글

  • 로리 2018/03/31 11:30 # 답글

    톤맴핑으로 어느 정도 이상 대응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너무 슬프군요
  • 城島勝 2018/03/31 15:00 #

    네, 아쉬운 일입니다.
  • 반페르시 2018/03/31 12:18 # 답글

    정독했습니다.
    전부터 궁금했던건데 HDR이란게 8bit -> 10bit 색대역 처럼 본질적인게 아니라

    야마하 홈시어터에 보면 입맛에 맞게 소리 모드 설정하는 것처럼 (이펙터? 필터? 이퀄라이징?)
    조미료 같은 부가 효과인가요?


  • 城島勝 2018/03/31 15:07 #

    HDR은 소스의 명암 다이나믹스를 보다 넓게 수록하는 것으로(촬영 소스부터 그러하든, DI에서 후처리로 그레이딩하든) 기본적으론 '근본적인' 영상의 체감 퀄리티를 높이는 게 골자입니다.

    다만 이상은 그렇다는 것이고, 휘도의 절대값을 구현하도록 설계된 HDR10의 경우 실제 구현에서는 디스플레이들이 따라가질 못해서 도리어 SDR보다 체감이 안 좋아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특히 프로젝터에선 화면이 어두워서(톤 맵핑을 아무리 해도 기본 밝기가 너무 낮아서, 아니면 아예 톤 맵핑을 못하니 일정 수준 이상의 밝기를 다 컷트해 버려서) 매가리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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