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에 흐르는 문학 작품들 취미

지난 번 조사이어 앨런 씨의 부인 이야기(링크)에 이어지는,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원제: 赤毛のアン, 일본내 1979년 방영) 관련 이야기. 이번 시간에는 본 작품에 흐르는 문학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50화라는 러닝 타임의 여유- 제작진에게는 압박(웃음)- 가 있었기에 원작 소설에서는 언급만 되거나 혹은 아예 거론되지 않았던 여러 오리지널 요소가 들어갔는데 개중 하나가 이번에 논하는 '여타 문학 작품들의 차용'입니다. 원래 이 작품의 주인공 앤이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이기도 하거니와 작품의 배경이 된 19세기~20세기 초반의 북미에서 유행했던 여가 향유의 모습을 채현하는 의도도 있어 원작 소설에선 낭송이나 노래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오는데,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실존하는 타 작품을 읊는 것을 통해 살을 붙였고 이러한 배려를 통해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단순한 원작 소설의 부연이 아니라 작품을 보다 풍성하게 즐길 수 있게 해주는 효과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는 빨강머리 앤을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익히 아실 터이나 출전을 알 수 없어 소개를 생략하는 <개암나무 계곡의 넬리>(원제: Nelly in the Hazel Dell) 외에 이 애니메이션에 흐르는 여러 문학 작품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시간 관계상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지나가듯 나오는 언급은 제외하고 어느 정도 비중있게 다뤄지는 작품들로 한정합니다.


* 스크린 샷은 赤毛のアン Blu-ray 제19화 중

1. 라인 강의 빙겐 : 등장 = 애니메이션 제19화/ 원작 소설 제19챕터

태어나서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작품을 읊는 발표회란 모임에 가 본 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필립스 선생이 읊는 '줄리어스 시저(셰익스피어 작)'마저도 열정적으로 들었을지언정 유일하게 무시한 작품이 길버트가 읊은 이 시입니다.

이 시의 원제는 bingen on the rhine으로 19세기의 영국 작가 캐롤라인 노튼(Caroline Elizabeth Sarah Norton, 1808~1877)이 지은 영시이며 원작 소설에서는 딱 한 줄 There's another, not a sister(번역: 그리고 또 한 명, 여동생이 아닌)만이 언급됩니다만 애니메이션에서는 길버트를 연기한 성우 이노우에 카즈히코 씨가 그 멋진 목소리로 5행 가량을 읊습니다. 시의 내용은 라인 강가의 마을이 고향인 한 병사가 고향을 그리며 읊는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특히 원작 소설에서 차용한 저 부분은 길버트가 앤에게 품은 감정을 말해주지만 당시의 앤은 이를 철저히 무시합니다.

참고로 Bingen은 독일어 발음의 한국어 표기에 따르면 '빙엔'이 더 널리 쓰입니다만, 이것은 영시이고 더구나 이를 읊는 것도 캐나다 사람인 길버트이므로 해당 단어의 영어 발음에 대한 한국어 표기인 '빙겐'이 대다수의 빨강머리 앤 한국어 번역서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 스크린 샷은 赤毛のアン Blu-ray 제28화 중

2.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 등장 = 애니메이션 제28화/ 원작 소설 제24챕터

에이번리 초등학교에서 연 크리스마스 발표회에서 낭송을 하게 된 앤이 고른 작품. 원작 소설에서는 24챕터에서 앤이 발표 수업에서 낭송해 보았다는 언급으로만 등장할 뿐 발표회에서 이 작품을 읊었다는 언급이 없으나, 애니메이션에선 앤의 발표회 낭송작으로 이 작품을 등장시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MARY, QUEEN OF SCOTS. 스코틀랜드의 시인 헨리 그래스포드 벨(Henry Glassford Bell, 1803~1874)의 작품으로 연극 무대에서도 자주 차용되었으며, 분명 이 발표회 이전 앤이 그렇게나 열심히 연습하던 신음 소리가 인상적인 작품이므로 애니메이션 제작진의 선택은 탁월했다고 보입니다.


* 스크린 샷은 赤毛のアン Blu-ray 제28화 중

3. 요정의 여왕 : 등장 = 애니메이션 제28화/ 원작 소설 제24챕터

역시나 크리스마스 발표회에 올려진 연극으로 앤이 시종A 로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 준 작품. 원작 소설에서도 앤이 재잘거리며 설명했던 이 작품은 영국의 작가 토마스 퍼시(Thomas Percy, 1729~1811)가 쓴 시 THE FAIRY QUEEN을 연극 무대로 옮겼습니다.

사실 'THE FAIRY QUEEN'이란 제목은 대개 헨리 퍼셀이 작곡한 오페라로 더 유명합니다만,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이 노래는 초등학생들의 발표회에 쓰기엔 너무나 장중한 느낌이 있다고 해야...


* 스크린 샷은 赤毛のアン Blu-ray 제28화 중

4. 내 마음 하이랜드에 있도다 : 등장 = 애니메이션 제28화/ 원작 소설 -

크리스마스 발표회에서 요정의 여왕 무대를 마친 앤이 무대를 내려올 때 머리에서 떨어진 꽃장식을, 바로 다음 순서로 등장한 길버트가 주워 상의 앞주머니에 꽂은 다음 낭송하는 시. 원제는 My Heart's in the Highlands로 스코틀랜드의 작가 로버트 번즈(Robert Burns, 1759~1796)가 지은 작품입니다. 이 시는 원작 소설에선 언급이 없는 완전한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차용작.

참고로 이 시는 KBS의 우리말 더빙에선 좀 이상하게 옮겨져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아래 행.

Farewell to the mountains high cover'd with snow; (원문)
高きを雪もておおわれたる谷よ、さらば (일본어 대사)
높은 곳에 눈 쌓이고 아, 깊은 골짜기여 안녕 (KBS 우리말 더빙)

Farewell to the forrests and wild-hanging woods; (원문)
林よ、人気(ひとけ)もなき森よ、さらば (일본어 대사)
나무여, 인기 없는 숲이여 안녕 (KBS 한국어 더빙)

위 행은 KBS에서 おおわれたる를 おお!(감탄사) + われたる로 나눠지는 걸로 착각해서 잘못 번역된 것 같습니다. 원문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여기의 おおわれたる는 覆う의 피동형. 따라서 옳은 번역은 '높은 곳이 눈으로 뒤덮인 계곡이여, 잘 있거라' 정도겠습니다. 한편 아래 행은 人気를 인기척을 뜻하는 ひとけ가 아닌 にんき(인기를 끌다, 인기 가수할 때의 그 인기)로 잘못 인식하여 역시 잘못 번역된 듯? 우리나라에선 '인기'라고만 쓰면 80년대건 지금이건 당연히 듣는 사람 누구나 인기 가수의 인기를 떠올리니 설사 PD가 무슨 의도가 있었더라도 이게 잘못된 전달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옳은 번역은 '숲이여! 인기척 없는 수풀이여! 잘 있거라' 정도.


* 스크린 샷은 赤毛のアン Blu-ray 제40화 중

5. 사디의 장미, 내 방 : 등장 = 애니메이션 제40화/ 원작 소설 -

호텔에서 열린 자선 공연에 에이번리 대표로 참석하게 된 앤의 앞 순서에, 유명한 낭독가 에번스 부인이 읊는 두 작품. 원작 소설에서는 그냥 '전문 낭송가가 앤의 앞 순서에서 읊었다.'라고만 언급하고 지나가는 부분에 애니메이션 제작진은 프랑스의 예술가 마르셀린느 발모르(Marceline Desbordes-Valmore, 1786~1859)가 지은 이 두 시를 차용하여 에번스 부인을 담당한 성우 고 히라이 미치코 씨의 목소리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두 시의 원제는 각각 Les Roses de Saadi, Ma Chambre. 당시 다소 불우한 생활을 이어가던 작가가 한탄의 심정을 담은 작품으로 작중 앤이 에번스 부인에 대해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다니, 뭔가 불행한 일을 겪은 게 아닐까' 하고 묘사하는 것과도 그 정서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다만 참고로 <사디의 장미>는 국내에서도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어서인지 KBS 더빙에서도 그런대로 엇비슷하게 번역해두었는데, <내 방>의 경우엔 완전히 내용과 동떨어지게 옮겨놔서 인상적이며 국내 정발 DVD의 자막은 이 KBS 더빙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그대로 받아 적어놔서 그 마치 신라 향가스러운 느낌이 한층 짙어집니다. 물론 이 시는 근대 프랑스 시이므로 신라 향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국내 정발 BD의 자막은 과연 어떨지?


* 스크린 샷은 赤毛のアン Blu-ray 제41화 중

6. 리어 왕 : 등장 = 애니메이션 제40화, 제41화/ 원작 소설 -

에번스 부인 다음으로 무대에 선 앤이 긴장감에 어쩔 줄 모르다가, 길버트의 모습을 보고 발끈하여 사기를 회복한 뒤 읊는 작품. 참고로 원작 소설에선 앤이 여기에서 <소녀의 맹세>(MARS LA TOUR, OR, THE MAIDEN'S VOW, 스탠포드 맥그리거 작)를 읊겠다고 명시하는데 애니메이션에서는 어쩐 일인지 이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중 제4막 7장)을 읊습니다. 그리고 이어 41화에서 에이번리를 떠나게 된 앤이 커스버트 남매 앞에서 읊는 것은 리어 왕 제4막 4장.

원작 소설에선 이 40화의 내용이 나오는 제33챕터와 41화의 내용이 나오는 제34챕터 양쪽 모두 <소녀의 맹세>를 읊었다고 나오는데 애니메이션에선 원작과 다른 작품이 차용되는 꽤 특이한 경우. 리어 왕의 셋째 딸 코델리아의 대사가 펼쳐지는 이 부분들이, 앤이 작 초반 곧잘 상상 이름으로 써먹었던 '코델리아 (피츠제럴드)'와 겹치는 데가 있다고 생각하여 차용한 것일까요?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의 감독 타카하타 이사오 씨는 영문학에도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제작자라 이 선택은 확실히 의외입니다만, 타카하타 감독이 이에 대해 별달리 멘트한 바는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선 없습니다.


* 스크린 샷은 赤毛のアン Blu-ray 제48화 중

7. 찬송가들 : 등장 = 애니메이션 제47, 48화/ 원작 소설 -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 제47화와 48화에서는 어떤 인물의 죽음과 그 이후가 그려지는데, 이 내용에 해당하는 원작 소설에선 그 언급이 없지만 극중 분위기를 위해 필요하다 판단했기 때문인지 애니메이션에서는 찬송가를 3곡 삽입하였습니다. 각각 山路こえて, 遙かに仰ぎ見る, 主よ御許に.

개중 山路こえて의 경우 일본 개신교계 오리지널 찬송가라 국내에는 익숙하지 않지만(캐나다 사람들이 일본 찬송가를 부르게 된 상황도 익숙하지 않다면 않지만), 遙かに仰ぎ見る의 경우 In the sweet by and by(국내 개신교계 기준, 찬송가 291장: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의 번안곡이라 가사는 많이 달라도 가락이 익숙한 시청자는 있을 듯하며, 主よ御許に는 그 유명한 Nearer, My God, to Thee(역시 개신교계 기준, 새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고 이 곡은 영화 '타이타닉'이나 애니메이션 '플랜더스의 개' 등 많은 작품에서 정말로 인상적으로 울리기에 꼭 신도가 아니라도 가락만 듣고도 '아, 이 곡'이라고 깨닫는 시청자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래 찬송가의 번역은 각국마다 교리 해석 등의 이유로 원곡을 단어 그대로 옮기는 번역을 지양하고 독자적인 내용으로 달라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遙かに仰ぎ見る는 그 전형이며, 主よ御許に의 경우에도 일본어 그대로의 번역은 국내 신도(혹은 성도)들에게는 꽤나 이질감 있게 다가올 공산이 있습니다. 다만 KBS 더빙에선 이 찬송가 세 곡이 전부 통삭제되었으므로 관계없는 이야기이며 정발 DVD 자막에선 일본어 가사 베이스로 다소 애매하게(혹은 좀 틀리게) 옮겨두었는데, BD에선 어떤 자막으로 나올지.

***

이상으로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에 흐르는 문학 작품들에 대해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 떠듬떠듬 서술해 보았습니다. 사실 전술했듯이 빨강머리 앤이라는 작품 속에는 이외에도 언급만으로 지나가는 여러 문학 작품들이 좀 더 있습니다만 제가 워낙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나마 써볼 수 있는 건 이정도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씀드리지 못한 다른 부분들은 빨강머리 앤을 사랑하는 더 많은 분들께서 언급해 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아울러 아마 이 글을 호기심에 클릭해 보셨다가 스크롤 바를 보고 바로 백스페이스를 누르신 분들이 많으실 것으로 짐작되는데(웃음), 여기까지 읽어보신 분들께는 즐겁고 풍요로운 설 연휴가 함께 하시길 기원해 드리겠습니다.


덧글

  • 산타 2016/02/05 13:31 # 삭제 답글

    자꾸 앤 글 쓰시면 곤란합니다. 앤은 이미 디브이디로 가지고 있고!! dvd로도 가지고 있지 않은 용형호제, 쾌찬차 블루레이의 한정판 놓쳐서 2월말에 나올 일반판,그리고 인어공주de블루레이 등 구매할 것들이 많아 앤 블루레이에는 눈길도 안 주고 있는데 자꾸 이런 글 쓰시면 앤이 블루레이 구매하라고 손짓하는 게 눈에 보인단 말입니다.
  • 城島勝 2016/02/05 13:58 #

    퍼허헛, 네. 하지만 지갑 단속은 개개인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웃음)
  • 피그말리온 2016/02/05 14:44 # 답글

    그러고보니 빨간머리 앤에서 벤허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네요...벤허가 빨간머리 앤보다 오래된 거라는데 놀랐던;;...
  • 城島勝 2016/02/05 14:49 #

    하하, 네. 앤이 수업 시간에 몰래 보다 선생님께 들킨 책이죠. 벤허는 워낙 찰턴 횽님 주연의 영화가 유명해서 그렇지 사실 꽤 더 오래된 작품입니다. 크크-_-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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