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물 속 세계관을 대하는 자세 취미

한 마디로 '창작물'이라고 해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빨간 창작물, 파란 창작물, 찢어진 창작물... 이 아니라 시간상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공간상으로 중세 판타지(비슷하게는 다른 세계 이야기), 근대물, 현대물, 근미래물 가끔 고대나 시간을 알 수 없는 세계 속에서 공상문명을 그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창작물 속 세계관은 여러 형태로 다가오곤 하지요.

개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엄중한 검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역시 현대물이 아닐까 합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이 겪는 생활상 혹은 공간을 그리게 되니 조금만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 나와도 어색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 이런 케이스의 발전형으로는 사서에 기록이 있는 사극류의 검증이 있겠는데, 이쪽은 그나마 역사에 대해 깊은 지식과 이해를 가지지 않으면 관심도 없는 경우가 많으니 목소리 볼륨은 상대적으로 현대물보다 작을 수밖에 없기는 하겠습니다.(대신, 지식과 이해를 가진 시청자들은 종종 대단히 편집적이 되기는 합니다. 그래서 퓨전 사극이라느니 역사 판타지라고 표방하는 사극류 영상물이 많아지는지도.)

그렇다고 '불멸의 이순신'이란 임진왜란 시대를 그린 드라마에서 크리넥스 휴지가 나오는 장면이야 순전히 제작진의 실수이고 여기에는 어떠한 의도도 없으니, 시청자들의 유쾌한 웃음 유발용은 될지 몰라도 비판적 해석이나 원색적 비난, 나아가 제재(!) 같은 것에 이를 리는 없습니다. 조선 중종 시대를 그린 드라마 '대장금'에서 궁중 수랏간에 가스 버너가 있었다한들 장금이의 요리 실력은 가스 버너 덕이었다! 라고 제작진은 말하는 것이다... 같은 시청자 감상이 나올 리도 없지요.

좀 우스운 예를 들었지만 이것은 '세계관을 대하는 자세' 중에 가장 이해하기 쉬운 '고증'에 대한 문제입니다. '고증'이란 비단 과거의 이야기뿐 아니라 현재(혹은 근현재)를 그리는 창작물 속에서는 더욱 보는 사람의 깐깐증을 유발하는데 이는 물론 앞서 언급한대로 직접 보고 겪었기 때문. 예를 들면 '응답하라 19XX' 시리즈에 대해 여러가지 소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다 이런 심리의 발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 아무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 시대 것들이 다 기억나지는 않던데, 정리하고 밝혀내는 분들이 적어 둔 것을 보면 '어, 그랬나?' 싶기도 할 정도로- 뭐, 여기서 중요한 건 제가 아저씨란 게 아니고(웃음) '응답하라 19XX' 시리즈는 그 제작 의도가 엄연히 '해당 시대를 그대로 그리면서, 그 시대를 살아 간 가상의 인물과 이야기'를 그리는 것이니 시대와 생활상 재현에 힘써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가끔, 그 익숙한 '현대물'에서 제작자와 시청자의 이해 관계가 엇나가는 경우가 생기면 이것은 구설수에 오르기 쉬운 요건을 갖추는 것도 같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 배경은 '현대'인데, 생활상은 (보고 있는 사람이 사는)현대와 뭔가 다른 그런 창작물이겠지요. 예를 들면 위 스크린 샷의 창작물은, 아키바(일본내 지역인 아키하바라의 약칭)와 뉴욕(같아 보이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이 좀 닮은 데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시청자들의 빈축을 산 모양인데, 개인적으론 좀 생각의 파울 라인 각도를 다르게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저 창작물 속에선 굳이 '뉴욕'이라느니 '미국 내 도시'란 언급을 극력 회피하지만, 자유의 여신상에 센트럴 파크에 타임 스퀘어 나오는 도시가 뉴욕은 아니다. <- 라고 할 수 있다고는 제작진도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 창작물의 제작진은 분명 '아키바와 뉴욕은 좀 닮은 데가 있다'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아키바랑 뉴욕이 어디가 닮았단 말인가?' 부터 '타임스퀘어 한복판에서, 연말도 아닌데(연말이라도 어렵겠지만) 고딩 애들이 공연을 한다고?' 까지 오만 가지 구설수에 오르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한 번 '(저 창작물 속)아키바는 (저 창작물 속)뉴욕과 좀 닮은 데가 있다.', '(저 창작물 속)타임 스퀘어는 문화의 날이라거나 보행자의 날 식으로 하여간 뭔가 늘 공연 타임을 가질 여건이 된다.' 같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뭐, 후자의 경우엔 배경이 자꾸 왔다리갔다리 하는 걸로 봐서 꼭 타임 스퀘어가 아닐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거기라고 해두고.) 사실 저 창작물 속의 아키바란 동네는,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도쿄도 분쿄구에 있는 '늘 야구하는 돔' 경기장이 있는 동네고-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에 있는 돔 경기장일 수도 있고, 어쩌면 Y모 팀이 메이지 신궁이 아니라 아키바에 돔형 홈구장을 갖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역시나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엄중히 금지된 아키바 주오도리(를 전세내다시피 한 규모의) 집회가 태연히 열리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 저 창작물은 현대물이긴 현대물인데 그 속에 사는 구성원들은 약간 나사가 빠졌지만(웃음) 굉장히 평화로운 사람들이라서(그런 사람들이 이룬 세상이라서), 뭔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해를 가지고 본다면(혹은 그렇게 이해를 제대로 시켰다면) 글쎄, 앞서 언급한 구설수가 비난이라느니 작품 개연성을 헤친다느니 하는 이야기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관점에서 볼 때도 저 창작물의 제작진이 이런 비난을 피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저 세상의 아키바가 어떤 곳인지 한 몇 시간 분량의 다큐를 틀어주고/ 저 세상의 뉴욕에는 보행자의 날 같은 행사가 있다고 뉴스건 신문 기사로건 깔아주면 되었을 수도? 이건 좀 과장스런 대안(특히 전자가)이지만, 어쨌거나 뭔가 설명이 좀 곁들여졌으면 저 창작물의 팬들조차 비웃는 사태에 이르지는 않았겠지요.

정리하면 저 창작물에 대한 구설수를 개인적으로 논평하면 [타임 스퀘어 광장에서 공연을 가진 것에 대해 개연성을 논하는 것은 좀 오버스런 비난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소리가 나오게 만든 데는 제작자 책임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쯤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를 볼 때 창작물 제작자가 보는 사람을 간단하게 이해시키면서, 또한 비난이 아니라 오히려 신기함을 가지게 하려면

- 신기한 설정을 어떻게든 이해시킨다. 2차 창작, 만화, 소설, 동인지, 커뮤니티, 팬카페... 모든 것을 동원하라.
- '현대'가 아닌 배경을 가진다.(혹시나 시간적으론 '현대'라도 공간적으로 '판타지'라고 못을 박는다.)

정도가 전제 조건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 매니아라면 굳이 안 봤어도 이름은 알 법한 위 이미지의 창작물은, 얼마 전에 개봉한 최신작에서 '포스'라는 정체불명의, 하지만 저 창작물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어렴풋이건 빠삭히건 하여간 그런 게 있다는 걸 이미 충분히 숙지한,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저 창작물의 배경이 위에 예로 든 애니메이션처럼 '현대(사실 공간적으론 좀 다르고 시간적으로만 그렇지만, 일단 척 보기엔 현대)'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있음직한 '뉴욕'의 '타임 스퀘어'에서 '포스'를 가지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면 120% '개연성 논란'에 휩싸일 것입니다.

하지만 '포스'에 대해 알고 있는 저 창작물의 팬들은 최신작의 전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여지를 갖고 대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포스'를 몰라도, 일단 우주를 휙휙 날아다니고 레이저 총을 허공에서 멈추고, 총 쏘는 군대와 함께 와선 정작 칼(광선검이라지만)로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기기묘묘한 판타지 세상에선 저런 뭔가 신나는(?) 전개는 그럴 법 하다라는 관객들의 이해를 끌어내기도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애초에 이 창작물의 장르는 'SF'라고 수십 년의 세월동안 못박혀져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포스'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개연성을 따지면 종종 팬들의 엄중한 항의를 받게 마련입니다.

***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보는 사람이 죄가 있거나 열등하다는 건 아닙니다. 1차적으로는 보게 만드는 사람이, 적당히 그럴 듯하게 이야기를 꾸며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를 게을리 하면 비난받는 거야 돈을 받고 뭔가를 보여주는 제작자들이 감수해야 할 일이라면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하고 싶다면 하고 싶은 말은, 뭐랄까 과거에 비해 점점 사람들은 창작물에 대해서도 좀 팍팍하게 대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는 것과 이런 시대의 창작물은 그런 보는 사람들의 니즈랄까 인식이랄까를 거슬리지 않게 만족시키는데 최선을 다하는 게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아니면 둘 다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욕 먹는 것보단 좋은 말 고운 말 듣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분명 어쩌면 보는 우리도 과거의 독자들보다 훨씬 잣대가 엄격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국지연의'가 이야기꾼들에 의해 논해지던 당시, 제갈 공명이 삼국 시대에 지뢰를 써서 등갑병들을 화장시켰다라는 (당연히)사서에도 없는 이야기를 이야기꾼이 신나게 떠들어도 이는 호응을 얻었고, 그래서 쭉 구전되어 우리는 현재까지도 같은 서술을 볼 수 있습니다. 엄연히 역사 속 인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런 황당무계한 소리가- 비유하면 [미군이 6.25 당시에 무인 전투기와 레이저 총을 써서 북한군을 이겼다] 라는 소설을 우리 후손들이 읽는 꼴- 즐겁게 받아들여졌던 시기가 있었던 건, 꼭 그 당시 사람들의 지식 수준이 모자란 무지렁뱅이들만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훨씬 너그럽고 창작물에 대해 창작물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PS:
이 게시물은 비단 영상물 뿐만 아니라 모든 창작물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하지만, 쓰다 보니 예시 자료가 영상물에 집중되었고 개중에서 영화관 상영물에 대해 많이 다뤘다 보니 영화 밸리로 발행합니다.


덧글

  • 남두비겁성 2016/02/01 15:24 # 답글

    따져야 할 것엔 안 따지고
    따지지 않아도 될 것에선 따지고

    그걸 재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다가 본질은 놓쳐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까다로움이 엇나갔다고 해야하나.
  • 城島勝 2016/02/01 20:11 #

    뭐, 누구나 너무 깊이 파고들다 보면 미아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 fallen 2016/02/01 21:31 # 답글

    뭐 비슷한 사례가 이족보행병기가 나오는 메카물에서 로봇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태클거는거죠
  • 城島勝 2016/02/02 10:43 #

    네, 그런 케이스에서 재미삼아 이래저래 하면 다들 즐거운데 진지하고 근엄하게 태클을 걸면 작품을 뿌리부터 부정하게 되기는 합니다. 다들 적당히 정도와 선을 지키면 좋을텐데, 현실은 점점 그렇게 되기 어렵긴 합니다. 사람들 삶이 팍팍해져서 그런가.-_-
  • 소시민 제이 2016/02/01 22:56 # 답글

    그냥 드라마는 드라마지... 무슨 고고학 방송이 아닌데....
    고증 어긋나네 라고 드립치는 인간들 보면...

    왜? 2차대전 리인엑트먼트 하시는 분들은 물티슈 쓰면 역적이겄네... 라고 들이 받아줍니다.
  • 城島勝 2016/02/02 10:45 #

    뭐, 드라마에선 이런 데 사실은 이런 거다- 하고 즐겁게 알려주는 식이면 생산적인데 이러니까 드라마가 잘못됐다는 식으로 비난으로 몰고 가게 되면 상당히 비생산적인 소모전이 되곤 하지요.

    재현 행사는 뭐... 물티슈 쓰는 순간만은 현실로 타임 워프! 이렇게 개그치고 넘어가면. 커커커;
  • ffqw23 2016/02/02 07:48 # 답글

    이게 참 미묘한문제인게...

    고증이 조금틀린거라던가 설정이 무리수인것도 작품이 아주재밌으면 그냥 그러려니하고 보게되지만

    작품이 이상하게 흘러가면 그런부분부터 눈에띄게 되니까요....
  • 城島勝 2016/02/02 10:47 #

    뭐, 사람 심리가 대개 그렇기는 한데 그 '작품이 이상하다'와 소위 '그런 부분'을 융합시켜 더 큰 비난의 포화 요소로 삼기보다는 그런 부분은 그렇고 이 작품은 좀 다른 점에서 이상하다(재미없다)라는 걸 구별하여 전자는 설명조, 후자는 논평조로 말한다면 좋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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