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TV, 미래의 TV 담론 취미

호사인지 낭비인지 그것도 아니면 순수한 호기심의 산물인지 향학열인지 별나게도 주력급 TV 2대 - 파이오니어 쿠로 500M과 파나소닉 비에라 55VT50 - 동거시키며 보고 있자니 새삼 드는 생각이 있어 마침 잠도 안 오는 김에 적어내려 봅니다.

지금은 TV 사업을 접었지만 TV사업부를 가지고 있었을 당시, 그리고 PDP를 데뷔시킨 이래 파이오니어가 아무리 업계 최고급의 화질 컨트롤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한들, 그리고 쿠로의 패널 메이킹이 전설이었다한들, 마지막 세대 쿠로가 생산된지 어언 5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LCD/PDP를 막론하고 어떤 컨슈머용 TV도 종합적인 화질로 쿠로를 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어떤 일이 그렇듯 이 사실 역시 하나의 원인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짚고 있는 부분은 한 가지 있습니다. 사실 저도 엄연히 소비자의 입장이라 말하기 불편하지만 사실 디지털 TV의 품질, 수명 저하는 소비자가 초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FHD 1080P 디스플레이 시대가 열린 이래 소비자들은 처음에는 그 대단히 좋은 화질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해가 갈 수록 TV의 화질 경쟁은 평범한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기 어려울만큼 상향 평준화 되어가고 제조사 입장에선 차별화를 주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화면이 아니라, 외관상 보기 좋은' TV입니다.

이 에스컬레이션은 처음에는 제조사들이 시동을 걸었지만 거기에 가속을 붙인 것은 소비자들입니다. 그 결과는 분명 반들반들하고 보기 좋은 TV들이 거실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만 소비자들은 한편으론 더 싸고(품질에 문제), 더 얇고(수명에 문제)를 점차 추구하는 데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제조사들은 거기에 발맞추려고 1년마다 신모델을 내고 또 내고. 결국 TV를 아무리 팔아도 적자를 면치 못 한 기업들은 속속 탈락하고 이 와중에 새로운 화질개발에 대한 노력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습니다. 특히 2008년 이후, 세계 경제가 어려워서 곤란한 건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라 가성비를 따지고 더 보기좋은 걸 놓자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보기좋다는 건 딱 봐선 별 차이가 안 나 보이는 화질보다는 TV의 생김새를 말합니다. 결국 서로서로 'batter'를 추구하는 가운데 만난 합일점이 현재 상태인 것이지요. 돈이 돈을 낳아 숫자로 재산을 따지고 소비가 풍족했던 시대(소위 거품경기)가 좋았다는 건지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하고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해 논하자는 것뿐.

이것은 악순환을 낳습니다. 돈이 돌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작금의 TV들은 해가 갈 수록 제조사의 예산 부족 때문에 하드웨어에 물량을 투입하는 기기는 점차 사라지고 - 소니 X4500의 RGB LED, LG LZ9600의 240디밍 존 같은 것들. 물론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단점이 있고 다소 삽질같은 측면도 있었지만 - 소프트 제어나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단가를 절감해야 하니까 소위 화장빨에 치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소비자에 의한 반품도 한몫합니다. 사실 공장화 대량 생산품들 속에 개별적으로 소소한 하자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또한 어려운 주문입니다. 물론 제품에 사용자가 만족하지 못 할 부분이 있으면 클레임을 제기하고 반품, 교환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치열한 가격경쟁 속에서 제조사는 1. 이러한 반품에 드는 비용을 제품 가격에 전가시킬 여지를 점차 잃고 있으며 2. 이때문에 한편으론 화질 개선에 들일 비용이 없게되고 3. 다른 한편으론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을만큼 델리케이트 한 요소'를 배제하는 쪽으로 나가는 경향이 심화됩니다. 이들 모두 화질에는 도움이 안 되는 요소들입니다.

그 쿠로도 대량 생산품이었잖은가? 하신다면, 60인치 쿠로 600M의 일본 생산량은 단 3천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이파이 메이커의 스피커라도 B&W급쯤 되면 이보다 더 많이 '팔리는' - '생산하는'이 아닌 - 제품이 수두룩하지요. 50인치 500M, 그리고 아랫급인 5020, 6020FD, 미주 한정인 PRO-111, 151, 101, 141FD들을 모두 합쳐봐야 올해 삼성은 커녕 파나소닉 PDP 생산량의 절반조차 미치지 못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격조높은 화질이 이 적은 생산량 덕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몇년 전, 파이오니어 쿠로를 통해 사실상 HDTV 라이프를 시작했던 저도 쿠로가 이렇게 오래 옥좌를 지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개별적인 요소로 쿠로를 넘어선 TV들이 그동안 없는 것은 아닙니다. 0% 블랙에 한하면 LED백라이트 LCD들이 쿠로보다 좋습니다. 동적 해상도나 Ycbcr 4:4:4(블루레이의 가장 순수한 신호) 입력 퀄리티는 파나소닉 비에라가 더 좋습니다. 색 정확도에서도 쿠로보다 더 정확한 TV가 없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요소를 종합한 '총합 화질'으로는 미치지 못 합니다.

이 총합 화질로 쿠로를 뛰어넘는 TV에 대해선 항상 내년에는...내년에는...이라는 기대가 매년 있었긴 했습니다. 특히 파이오니어의 기술력을 흡수한 파나소닉에 거는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슬슬 희박해지는 감이 있습니다.

일단 LCD는 LED로 백라이트를 걸거나말거나 어차피 올블랙 외에는 쿠로를 넘을 수 없습니다. 할로, 패널 특성 혹은 빛샘에 따른 유니포미티 문제, 시야각 문제, LCD 패널이란 태생에서 오는 동적 해상도의 불리함, 디테일 표현력의 문제 등등. 블랙도 평탄도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면 어차피 게임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고.

물론 LCD는 색 정확도 측면에선 APL을 걸 수 밖에 없는 PDP(이는 쿠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쿠로는 그 APL제어가 훨씬 정교하여 '정확한 화면'에 거의 영향을 안 주기 때문에 PDP면서 PDP가 아니라는 것이지만)에 비해 보다 정확하게 화면을 교정하고 맞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소위 '쨍함' 즉, 화이트 휘도의 인상적인 면에서도 PDP진영 그리고 쿠로 역시 LCD에 밀립니다. 허나 이는 '총합적인 그림 퀄리티'에는 2차적인 사안일 뿐입니다. 저의 좁은 소견입니다만 개인적으론 LCD 진영에는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럼 PDP쪽은 어떤가. 상술했지만 PDP쪽에서 기대를 걸었던 파나소닉은 파이오니어 철수후 그 기술을 일부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 그후 5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버금간다.'일 뿐입니다. 이른바 비에라 최고급 라인 'VT'가 생기고 그 VT가 VT10, 25, 30에 걸쳐 진화해 가지만 늘상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는 기분이었는데 50에 와서도 '조금만 더'하고 있자니 좀 지치는 기분입니다.

물론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면 VT50은 2012년 신제품 기준 방식을 막론한 최고 화질로 인정받는 TV이며, 이전의 개인적인 감상문에도 적었듯 쿠로에 반~한끗발 밀릴 뿐이긴 합니다. 그러나 반끗발이건 반에 반끗발이건 밀리는 건 엄연히 밀리는 것이고. 제 개인적으론 차라리 2D화질 개선쪽은 포기하고 3D 밝기를 확 늘린 물건을 내놓는 게 파나소닉의 영업이익을 위해서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PDP 태생상, 그리고 전력소모 절감상 이건 이것대로 어려운 문제지만. 그리고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파나소닉은 2015년 OLED TV 생산을 공언하고 있습니다. PDP에 기울일 노력은 2013~2014년이 리미트입니다.

VT50은 총합 화질 측면에서 8세대 쿠로는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9세대라도 5020FD 같은 보급형 9세대 쿠로와 비교하면 투닥거릴 레벨이라고 역성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500M을 위시한 엘리트 모델 이상의 쿠로와는 어쩔 수 없는 열세를 드러냅니다. 내년, 아무리 길게 잡아도 내후년까지 이 격차를 메꿀 수 있을까요? 그 답은 파나소닉만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해서 파이오니어 같은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그런 TV는 내지 못 하리라 멋대로 예상하게 되었습니다. VT50을 보고서.

즉, 사업부가 사라지므로 더이상 발전시킬 시간이 없으니 코스트를 무시하고 그 시점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기술과 물량을 부어 만든 쿠로를, '다음해 사업을 영위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팔아야하는, 그리고 다음해 나오는 TV가 이것보단 좋아야하는' 아주 미묘한 입장에서 만든 비에라가 최소 동등 혹은 능가할 수 있을까 없을까? 전 없다는 쪽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좀 성급한 예측같지만 이제 남은 건 신소재 활용 정도입니다. 즉, '낮은 코스트를 들여도 되는, 그러니까 발전한 기술력으로 과거의 물량공세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이여야 합니다. 사실, 정말 제한적이긴 하지만 총합 화질에서 쿠로를 뛰어넘는 TV가 2012년 현재 존재합니다. 소니의 OLED BVM. 방송용 모니터인 BVM의 최신 라인업으로, 25인치라는 크기의 한계와 2천만원을 넘어가는 가격(그나마도 F250 기준. E250이면 3천만원 오버)이 문제지 그런 걸 무시하면 분명 '총합 화질에서'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거의 전 부문에서' 쿠로보다 앞서는 제품입니다. 다만 이 제품이 OLED의 수명 문제(정확히 말하면 블루의 수명문제)를 해결했는지 여부는 아직 불명확합니다. 어쨋든 발매한지 1년이 될까말까한 시점이라 아직 검증될 단계가 아니라서.

사실 수명 문제를 차치하고 순 성능만 따져서라도, 이러한 제품을 일반 소비자용 TV에서 아무리 비싸도 1만 달러 이내(보다 손에 닿는 가격이라면 3~4천 달러 아래)에서 구현하는 것 또한 별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TV의 '화질'을 그 가격을 주고라도 손에 넣고 싶어하는지 여부는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삼성, LG의 55인치 OLED TV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초기 출하가가 양사의 55인치 최고급 LED백라이트 LCD와 비교할 때 2.5배~3배 가격인 TV지만 그 화질적 우위를 확연하게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렇다해도, 많은 걸림돌이 있다해도, 언젠가 OLED가 현재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완성도 높은 화질을 가지고 적당한 가격까지 갖는 시대는 분명 올 것입니다. OLED가 아니라 다른 신소재가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조차도 분명 그런 시대가 옵니다. 그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미 화질에서는 쿠로보다 좋게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남은 문제도 어떻게든 해결해 볼 수 있는 문제이긴 합니다. 실현 레벨에선 훨씬 복잡미묘한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겠지만 그건 항목은 달라도 PDP나 LCD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LG나 삼성이 LCD에 기울이는 노력의 2/3만 PDP에 쏟아도 파나소닉쯤은 이미 제치고 '보다 쿠로에 버금가는' PDP가 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LG나 삼성도 파나소닉처럼, 아니 파나소닉보다 더 사세가 기울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OLED 혹은 다른 신소재 TV는 어디서 개발할까요. 여전히 일본? 아니면 중국?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긴 합니다...


덧글

  • 링고 2012/12/02 05:37 # 답글

    글 잘 봤습니다.
  • 城島勝 2012/12/02 06:43 #

    네, 감사합니다.
  • 로리 2012/12/02 13:45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城島勝 2012/12/02 16:57 #

    감사합니다. 로리님의 디스플레이 블로그(웃음;)에 비하면 하찮습니다.
  • Ithilien 2012/12/02 15:08 # 답글

    아. 진짜 요즘 산업 전반에 걸친 문제가 이런거라 생각이 들어서 좀 씁쓸합니다.

    정말 쿠로 500M은 구입하신 분들에겐 정말 효자인 물건이 되었군요.
  • 城島勝 2012/12/02 17:03 #

    전체의 문제가 어느 한 곳에만 나타나지는 않는 법이니 여기나저기나 비슷비슷하지요. TV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예를 들기가 좀 더 용이했을 뿐입니다.

    500M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우수한 TV가' + '그동안 파이오니어가 낸 TV들 중 가장 발매가가 저렴'했지요. 최후의 떠리 덤핑 때는 발매가의 반의 반까지 내려갔던가 그랬고...
  • 천하귀남 2012/12/02 18:49 # 답글

    더이상 화질을 올려도 이걸 상당수 소비자가 알아주기 힘든 단계가 되가니 화질보다 단가경쟁이나 디자인 경쟁으로 가는건 어쩔수 없는듯합니다. 물론 기술적으로 개선여지는 있다고 봅니다만 갈수록 과거보다 저렴하게 즐길거리가 늘어나는 사회환경상 가격부분은 점점 내려갈것을 요구받는것은 어쩔수 없다고 봅니다. 그안에서 화질을 올릴 방법을 찾아야 겠지요.
  • 城島勝 2012/12/03 06:22 #

    예술이든 기술이든 돈이라는 물을 줘야 잘 크는 꽃일 터인데 세월이 팍팍합니다. 스마트 기술이니 디자인이니 이런 요소를 떠나 화질 자체를 올리기 위해선 결국 그래서도 '완전 신기술'이니까 '돈을 더 내!' 할 수 있는 새로운 소재가 각광받을 수 밖에 없겠는데, 이를 더 활발히 연구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내부에 돈을 쌓아둔 회사 정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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