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소테릭SACD 시리즈 - 차이코프스키/글라주노프 바이올린 협주곡 음원/음반/서적 감상

일전에 스테레오 사운드 어느호에 '하이파이 오디오 메이커 에소테릭, SACD시리즈 발매'라는 제호의 기사가 있어 흥미를 가지고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주요 골자는 ...(전략)그간 일본내 하이파이 기기 제조업체로 이름높았던 에소테릭이 과거의 명반들을 SACD 시리즈로 복각하여 발매(후략)... 한다는 이야기.

개인적으로 에소테릭이라는 회사엔 나름대로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그들이 만드는 SACD라니 꽤 재밌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지금와서 말입니다만 좀 부정적인 의미로요. 에소테릭이란 회사는 확실히 일개미스럽게 물건을 부품 꽉꽉 채워서 잘 만들긴 합니다만 그들이 만든 기기로 음악을 들어보면 뭔가...'증류수'를 마시는 느낌밖에 안 났기 때문입니다. 증류수의 장점과 단점 모두가 이 회사 기기와 잘 어울리지요.

아무튼 해당 기사와 함께 소개된 음반들, 그리고 몇호인가 후의 스테레오 사운드에서 다시금 한 번 추천한 뒤로 앨범 소개란에선 더이상 나오지 않는 모양입니다만 개인적으론 흥미가 동한 이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구입까지 이른 것은 이번에 소개해 드리는 앨범이 처음인데 사유는 세가지. 1. 이 시리즈는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완전 한정수량 발매라 발매되면 얼마후에 곧 품절되는 걸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물리적인 이유, 2. 이 시리즈의 선곡은 말그대로 '과거의 명반'들이다 보니 이미 가지고 있는 게 대다수...그것도 지휘자별, 연주단별 등등 중복도 많다. 라는 정신적인 이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소테릭'이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제게 있어 부정적인 울림. 뭐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겠습니다.

2+3이 결합하여 조금 우물쭈물하다보면 곧 1처럼 품절되어 버려서 자연스레 소닭보듯 하게 되어 버렸는데, 기어이 이번만은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래서 소개해 드릴 수 있게 된 것이 이 음반, [차이코프스키/글라주노프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9월 1일에 발매된 본 SACD는 몇가지 의미에서 아주 모범적인 '에소테릭'스러운 음반입니다. 열거해 보면.

1. 굉장히 익숙한 레퍼토리: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메이저 Op.35 (설명), (연주 샘플. * 본 SACD와 같은 연주자/연주단은 아닙니다.)
글라주노프 바이올린 협주곡 A마이너 Op.82. (설명), (연주 샘플. * 역시 본 SACD와 같은 연주자/연주단은 아닙니다.)

둘 다 제목은 몰라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다들 들어보셨을 곡들입니다.

2. 클라우디오 아바도 + 베를린필:
클래식 팬에게는 너무나 유명하고 익숙한 지휘자와 연주단의 조합. 여담이지만 이 SACD의 원본은 95년에 텔덱에서 녹음했는데 아바도의 첫 텔덱 녹음작품이었으며 이 연주 전후에 베를린필이 아바도 + 벤게로프(바이올린 연주자) 조합으로 공연한 적이 없습니다. 즉, 이 연주는 완벽히 레코딩 목적의 특별 프로젝트였던 셈.

3. 바이올린 주자 막심 벤게로프:
약간 농담 보태서 지구방위대급 바이올리니스트. 현 시점에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필요하신 분은 여기를 참조해 주십시오. 덤으로 이 연주에 사용한 악기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루 레니에(1727년작)입니다.

4. JVC 마스터링 센터의 에소테릭 기기들:
이 복각 SACD를 제작한 JVC 마스터링 센터는, JVC의 고음질 음반 XRCD 제작에 투입하는 이념을 계승한 곳으로...말그대로 사용 기기와 선재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쓴 곳입니다.

북클릿 뒷면에 이 음반 제작에 관여한 인원과 에소테릭의 기기에 대한 언급에 따르면 D/A 컨버터로는 에소테릭 D-01VU, 마스터 클록 제네레이터로는 에소테릭 최고급품인 G-0Rb가 사용되었음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복각 소스도 텔덱이 보유하고 있던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를 사용했음은 물론이고요.

말그대로 드림팀 조합으로 녹음한 음반을 + 에소테릭다운 물량투입으로 복각해낸 SACD라는 이야기. 더군다나 SACD 최대 수혜 악기라는 바이올린까지. 그야말로 대군大軍을 투입한 전장을 보는 느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정도 조합이라면 일단 그 물량공세만으로도 들어 볼 가치는 있겠다 싶어서 결국 제 첫 에소테릭SACD 시리즈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구입하기 전부터, 구입하고 나서 듣기 전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불안 요소도 있는데, 북산의...아니 에소테릭의 불안요소 그 첫번째이자 모든 것. 풋내기...아니 증류수 에소테릭.

언제나 자사 기기에, 특히 자사 고급기라면 아낌없이 물량을 쏟아붓는 에소테릭입니다만 그 결과는 항상 딱딱하거나 음악성이 결여된 운운...하는 비평에 시달렸고 개인적인 감상도 크게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소스 기기 중에서도 트랜스포트라면 몰라도 DAC, 앰프에 이르면 도저히 쓸마음이 안 나게 하곤 해서.

이렇게 기대 70%/ 불안 30%를 가지고 구입한 당일 밤 제 시스템에 걸어서 들어 본 결과는 이러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깊은 것은 굉장히 모범적인 SACD반이란 점입니다. 전대역에 걸친 영롱한 울림, 우수한 음의 깊이감, 한계선까지 뽑혀 나오는 바이올린의/ 특히 고역에서의 뻗음새 등은 이 복원 마스터링 반이 추구한 바를 아주 명확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다이나믹 레인지에선 정말 모범생 중에서도 상 모범생인 SACD이고 그런 점에서 말그대로 에소테릭 다운, 철저함을 엿볼 수 있는 SACD입니다.

오케스트라의 무대감이 충분히 느껴지지만 어디까지나 바이올린의 존재감을 충실하게 서포트하는 감이라는 점도 그러합니다. 충분한 입체감을 통해 바이올린이 앞에 나서서 이끄는 기수라는 감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 역시 기수를 맡기에 부끄럽지 않은 수준으로, 앞서 말씀드린 귀에 익은 곡들을 주자의 개성을 담아 들려주는 데서 상당한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오케스트라 쪽은 '합주'이며 '정공'스런 연주로 서포트하며 바이올린은 이를 유니크하게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빚어내는 선율이 아주 즐겁고 또한 그러면서도 '협주'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점이 아주 훌륭합니다.

이 녹음이 진행된 95년, 벤게로프의 나이 약관 21세. 21세...21세...참, 음악은 천재들만이 하는 것임을 아주 뼈저리게 깨닫게 해줍니다. 오랜 옛날 당시 기본 소양쯤 되는 피아노를 잠깐이나마 뚱땅거렸던 게 악기 연주 소양의 전부인 저조차도 좌절하게끔 하니...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 곡을 듣는 것이 즐거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청자'인 저로서는 만족스러울 뿐입니다.

이러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역량 덕분도 물론 있겠습니다만, 이 SACD는 분명 전체적으로 에소테릭스럽지 않은 유연함과 음악성이 느껴짐도 아울러 언급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개개인의 시스템이 물들일 여지가 남아있는 '음반'이란 점도 긍정적이고요. 제 시스템에서 이 음반의 모든 것을 뽑아냈는지 어떤지 불안감이 있기도 한 바 다른 시스템에서 즐기는 맛도 각별할 듯 합니다.

이 음반을 다 들은 시간은 딱 자정. 총 수록 시간 54분 27초, 거기다 둘 다 너무나 귀에 익은 곡인데도 무심코 '끝났어?'하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이것이 아마 이 음반에 대한 제 개인적인 찬사를 한 마디로 담고 있는 말이라고도 생각됩니다. 말그대로 이런 퀄의 많지 않은 SACD 몇 장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좋은 SACD플레이어를 꼭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그런 음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옥의 티는 간혹 가다 음이 튀거나 잡소리가 섞인다는 점 정도. 케이스 내측에서 이에 대해 미리 사과하고 있기는 합니다만.(마스터 테이프에서 기인한 튐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5년이 넘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점은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더 늦기 전에 DSD마스터링을 거쳐 이러한 괜찮은 퀄리티의 SACD로 나왔음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올리는 감상기, 특히 디스크 매체 감상기에선 어째 항상 빠짐없이 덧붙이는 듯한 '쉽게 손이 가지 않는 가격', '제대로 재생하는 데 드는 어려움'에다 한 술 더 떠서 '구하기도 쉽지않은' 타이틀을 소개해 드리는 점 다소 송구스럽습니다만 클래식 장르,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떠나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접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음반은 에소테릭 독점 발매반이기 때문에 에소테릭 관계 매장 외에는 공급이 안 됩니다. 국내에선 용산의 모 매장 한 군데 뿐이며 일본에선 몇몇 오프라인 매장 혹은 아마존 저팬의 샵셀러 물품 정도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정가 3300엔. 음반에 대한 기타 설명은 에소테릭의 관련 페이지(링크, 일본어 페이지)를 참고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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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AIN 2012/09/20 11:19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 한번 구해보긴 해야 겠네요.
  • 城島勝 2012/09/20 16:04 #

    예, 좋은 음반입니다. 한정반이기도 하니 구해두실 수 있을 때 구해두시는 것도 좋지요.
  • peter rabbit 2012/09/20 13:43 # 삭제 답글

    그래도 에소테릭이 sacdp는 잘 만들죠 사실 다른회사가 안만드는거기도 하지만 ㅋ 요근래 코드64도 dsd 지원한다니 이젠 끝일려나
  • 城島勝 2012/09/20 16:17 #

    글쎄요. 에소테릭의 SACDP는 픽업 메커니즘과 디지털 신호 처리부까진 좋은데 걔네 DAC을 거치면 역시나 증류수라. 그나마 요새 나온 K시리즈는 괜찮다는 평도 있던데 이쪽은 실물을 아직 못 봤습니다. 환율 때문인지 가져다 놓는 데가 없어서.
    에소 자신들도 DAC부 처리에 자신이 없음인지 아예 별다른 처리를 거치지 않고 DSD 패스 스루로 뽑는 것도 지원하긴 하더랍니다만 그거야말로 트랜스포트고. 트랜스포트라면 에소테릭이 잘 만든다는 걸 저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코드64가 DSD지원을 시작했어도 DSD지원 DAC은 여전히 종류가 턱없이 적어 셀렉트 범위가 너무 제한적인 데다가...결정적으로 SACD에서 DSD파일 추출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PS3 3.55이하 외엔 대안이 없으니) 별로 의미가 많아 보이진 않습니다. 물론 고스펙 음원 다운로드 업체들이 슬슬 DSD파일도 취급하는 것 같긴 한데 너무 제한적이고 어떤 건 SACD를 사는 것보다 비싸기도 해서 영. 이런저런 이유로 차라리 SACD를 사는 게 더 나아 보입니다.

    또한 SACD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유니버설 플레이어들 덕분에도 SACDP의 명맥은 계속 유지될 겁니다. 물론 현세대 유니버설 플레이어의 SACD 재생퀄이야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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