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03일
'삘이 꽂힌다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
사람은 보통 뭔가에 '급 삘'이 꽂히면 주체를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사실 항상 느긋하고 모든 일에 흥미가 없어하는 것 같지만, 이런 증세에서 자유롭지 못 합니다.
이른바 '삘이 꽂힌 사람'은 일단 초반에 엄청 달립니다. 달린다는 의미는 물론 관심, 시간, 열정을 쏟아붓는다는 의미지요. 저에게 그 대상은 게임이 그랬고, 야구가 그랬고, 만화가 그랬고, TRPG가 그랬고, 몇몇 작가의 책이 그랬고, 포도주가 그랬고, 요리가 그랬고, 클래식 음악이 그랬으며, 최근에는 블루레이 정확히는 FHD영상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 인간에게 허용된 돈, 시간, 열정의 한도가 있기 때문에 앞서 꽂힌 대상들이 지금도 꽂혀 있을리는 만무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른바 삘이 사그라들면 두 가지 갈림길이 생기는 데 '원숙하고 느긋하게 즐기는' 것과 '더 이상 아무런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소금맞은 지렁이도 동정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일단 한 번 삘이 꽂힌 것 치고 완전히 차버린 것은 없습니다. 지금도 게임을 하고, 야구를 하고, 만화를 보고, TRPG에 대해 연구하며, 몇몇 작가의 책을 사 들이고, 포도주를 가끔 마시고, 요리도 하고, 클래식 음악도 즐깁니다. 단지 초반 '달림'에 비하면 거기에 들이는 돈, 열정, 시간이 줄어든 것 뿐입니다...느긋해진 것이죠! 물론 변명입니다. 시간은 그렇다치고 돈과 열정은 개인의 능력으로 무한정 쏟아넣을 수 있습니다. 전자는 재력이, 후자는 체력이 중요한데 이런 것이 무한정 나오는 부류의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다만 전 그렇지 않다 이거지요.
서론이 길었는데, 하여간 전 나흘전부터 뿔에이취디 영상에 꽂혔습니다.
이번 삘이 얼마나 갈 지는 아직 모릅니다. 다만 현재는 상당한 돈과 시간과 열정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첫 예시는 [살아있는 지구]블루레이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사실 블루레이판 [살아있는 지구]는 좀 비싸기 때문에 (Y모 온라인 샵 판매가격을 보자면 9만 9천원), 아직 FHD 영상이란 것을 제대로 본 적 없는 저로선 꽤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TV 산다고 보러 다니면서 TV 매장에서 좀 보긴 했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소스는 지상파 방송이었고, 또 매장에서 보는 것과 집에 가져다 놓고 소파에 앉아서 보는 것과는 차이가 큽니다.
그래도 함 보자...하는 생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대신 이번달 회식 술값은 옆자리에 떠넘기자...라는 생각도 했습니다.(-_^;) 정말이지 소주값 아껴서 눈을 즐겁게 하자는 건 너무나 건전한 생각이지요!
문제는 고민이 끝난 게 금요일 밤이라서...주문을 해 봤자 다음주에나 올 거란 겁니다. 이래선 안 되지. TV는 오는 데 재생할 게 없어서야...(다크 나이트가 있었지만 부모님 취향이 아니시라 들이대기가 좀)
일단 가장 싼 곳을 찾다보니 찾아낸 게 11번가. SK텔레콤 멤버쉽이니 뭐니 다 동원해서 7만원대로 깎아내리고, 셀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거 직접 수령하러 가도 됩니까?" 괜찮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 신림동입니다. 그게 토요일 아침. TV 오기 직전.
결론적으로 배송료도 안 빼주고(무료배송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가격표를 보니 실 가격 9.5만+배송 3천이라고 되어 있었...) 지하철비+시간+비오기 직전의 조마조마함 까지 합쳐졌으나 그 모든 것을 뚫고 전 [살아있는 지구] 블루레이 박스를 들고 귀가했다는 것입니다. 브라비아를 실은 탑차가 오기 직전에.
뭐 이정도를 가지고 열정이니 시간을 쏟았느니 운운하느냐...하시겠지만, 서울시민으로서 허락된 한정된 시간(1주일에 48시간)을 감안하면 저한테는 큰 결심입니다. 아무튼 집에서 왕복 2시간쯤은 걸렸고...에또, 음음.(;)
그대신 [살아있는 지구]의 영상미라 하면 충분히 고생을 보상할만 했습니다. 특히나 부모님이 그렇게 느끼시어 아주 만족스럽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TV구입은 저도 그렇지만 부모님께 선물...이란 의식도 꽤 컸으니까요. 7년전에 저는 아버지의 지갑을 우려내서 베가 님을 들였지만 이번엔 제 지갑을 털어서 브라비아 님을...우하하(;;)
이번 삘이 얼마나 갈 지, 어떻게 끝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다시 심취할만한 상대가 생겼다는 것으로, 무언가에 심취한다는 것이 주는 즐거움이 시작된 것은 분명합니다. 심취할 대상이 생기지 않는 인생은 너무나 쓸쓸할 겁니다. 세상에는 무언가에 심취한 사람들을 비웃는 단어도 존재합니다만, 그 단어들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조차 또 다른 무언가에 홀려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또한 세상일일 것입니다.
여간 그런 점에서 이번주 주말에는 저의 취미들을 몽땅 동원해 볼까 합니다. 그러니까, Z5600으로 야구 게임을 하면서/만화책을 쌓아놓고/TRPG 룰 북을 펼치고/몇몇 작가들의 책을 그 옆에 쌓아놓으면서/포도주 한 병을 따고...모든 준비가 갖춰지면 게임을 끄고 클래식 음악 실연 영상을 블루레이로 보는 것입니다!!! (퍽퍽퍽퍽)
...그냥 하나만 하라구요? 알겠습니다. 그럼 기필코 역습의 찰리 블루레이를 찾아 와야 겠군요. 껄껄.
# by | 2009/11/03 09:57 | 취미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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